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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8. 18世 〉17. <부정공>증통훈대부사복시정만오공휘기현묘갈명(贈通訓大夫司僕寺正晩悟公諱基賢墓碣銘)
1. 문헌 목록 〉18. 18世 〉19. <부정공>무본재공휘기신묘갈명(務本齋公諱基信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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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부정공>무본재공휘기신행장(務本齋公諱基信行狀)
務本齋公諱基信行狀 公諱基信字聖一號務本齋趙氏系出淳昌高麗門下侍中諱璋爲鼻祖歷二世諱元吉號農隱諡忠獻諱瑜號虔谷官副正八杜門洞守岡僕義諱崇文號竹村諡節愍諱哲山號龜川父子同死 世祖丙子之禍並副正三世旌閭爼豆旨瓊號杜門因禍隱跡諱昌門校尉部將諱愷號遯隱 宣廟己巳以丙子死節后仍除參奉諱宗元奉事壬辰之亂勳勞著效事載殉義碑諱蓂軍資監正諱允纘贈參議諱致亨節制使 贈參判寔公高祖以上也曾王父諱世行節制使王父諱東昌通德郞考諱顯龜妣木川張氏泰毅女公生于 英廟庚辰是年 見背零丁孤子至于成長自勵名檢克紹先德以來未承嚴顔爲至恨事母夫人志体兼養極其誠敬或値患節輒顙北辰期有應驗及其親年日邵自知不足一日之養三公不換歲己未正月二十四日母夫人以天年終哀毀踰禮每哭泣往而不返附於身者附於棺者必誠必愼不之有悔以翌月襄奉于蘇亭山距家十里許廬于墓側朝夕涕淚草木亦感其哀二十五月如一日未嘗少懈服闋以奉養無所每當忌辰盡其誠敬祭品欲其豊潔致齋必見所爲哀慕之心到老彌篤以故鄕黨親戚慕其孝過蘇亭者必加指點曰趙公廬墓之所也公勤儉成家生事不至窘乏迨季年多少債劵悉附丙丁曰以此傳後徒貽危辱窮者周之匱者恤之遠近親踈感得其歡心以 純祖戊寅正月十八日考終墓黃鷄嶝可葬洞丙坐原配濟州梁氏命輔女生公後二十一年有女士行御家以法理財有道晩年以七石土納宗宅四石土分給二女有遺書墓上下塋無嗣取兄子鎭龍爲後以孝行著名被薦鄕道見褒士林且其厚德重望多稱服女長適府使延安李台成即基鎭曾祖也次長興高在鎭善浩珪浩兌浩璉浩星山李仁淳竹山安德洙鎭龍男女也炳儀李壻男也濟九濟八濟七濟五濟三濟一高壻男也秉斗秉文秉周善浩男秉準炳仁秉祚珪浩男秉哲兌浩男秉年璉浩男主鬯者秉斗男也內外玄孫若干繁不盡錄公少孤未得趍庭之訓而能自拔於類俗之中敦尙質行不事表봸雖無功名事業耀人耳目者而鄕譽不泯到今騰入口誦至於廬墓似或過於中制然自喪禮之毀居家者妻子同處無復防限故李文成先生要訣以爲不若廬墓之爲愈夫先王制禮莫嚴於喪葬人情所迫莫切於送終於此不用其誠烏用其誠乎嗚呼公之至誠可以感天地而矯濁俗回古風矣基鎭忝在彌甥雖未及趍拜門下而知公則庶爲不後於人特恨當時嘉言懿行多補世敎勵後進也曾而不得傳於世而所傳者畧是大槩耳後之君子由是而求之亦可以一班而知全豹矣公之曾孫秉文氏屬基鎭爲狀基鎭無文不足以稱揚盛德然謂之阿其所好則未也如有立言者當裁擇焉 外裔孫 延安 李基鎭 謹撰 무본재공휘기신행장(務本齋公諱基信行狀) 공의 휘는 기신(基信)이요 자는 성일(聖一)이며 호는 무본재로 순창조씨인데 고려문하시중 휘 장을 상조로한다. 二세를 지나 휘 원길은 호가 농은(農隱)이요 시호는 충헌(忠獻)이며 휘 유의 호는 건곡(虔谷)이요. 벼슬은 부정(副正)인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망복 절의를 지켰다. 휘 숭문의 호는 죽촌(竹村)이요 시호는 절민(節愍)이며 후 철산(哲山)의 호는 귀천(龜川)인데 부자가 함께 세조 병자년에 사육신의 참화에 죽어 부정공과 함께 三세를 정포하여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휘 경(瓊)의 호는 두문(杜門)인데 화로 인하여 자취를 숨겼으며 휘 창문(昌門)은 교위부장이요 휘 개(愷)의 호는 둔은(遯隱)인데 선조기사년(一五六九)에 병자사절신(丙子死節臣) 후손으로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휘 종원(宗元)은 벼슬이 봉사(奉事)로 임진왜란에 공훈이 있어 그 일이 순의비에 실려있다. 휘 명(蓂)은 군자감정이요 휘 윤찬(允纘)은 증참의며 휘 치형(致亨)은 절제사 증참판이니 이상이 공의 고조 이상이다. 증조 휘 세행(世行)은 절세사요. 조휘 동창(東昌)은 통덕랑이며 고의 후는 현구(顯龜)요 비 목천장씨(木川張氏)는 태의(泰毅)의 따님이다. 공이 영조(英祖) 경진년(一七六○)에 출생하였는데 이 해에 부친이 별세하여 혈혈 고아로 장성하면서 스스로 힘써 명성을 닦고 선덕을 이었는데 복친 안면을 뵙지못한 것을 지극히 원통하게 생각하고, 모부인을 섬기되 뜻과 몸을 함께 받드는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혹 병환이 나면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기어이 응험이 있게 하며 어머니의 춘추가 높으니 하루의 봉양 하는것이 삼공(三公)과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았다. 기미년 一월 二十四일에 모부인이 천수를 다하고 별세하시니 슬퍼하고 몸을 상함이 예에 지나쳤고, 항상 가고 돌아오지 못함을 통곡하여 몸을 부여잡고 널을 어루만지며 반드시 지성과 공경으로 후회 없이 하였다. 다음 달, 十리 밖에 있는 소정산(蘇亭山)에 안장한 뒤에 묘소 곁에 여막을 치고 조석으로 곡읍하니 초목도 그 울음 소리에 감동하였다. 二十五개월을 하루같이하여 조금도 게을리 아니하고 탈복 후에는 봉양 할곳이 없음을 한탄하여 매번 제사날을 당하면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수를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되 반드시 계신 것같이 하여 늙도록 더욱 독실하게 하니 향당친척이 그 효도에 감탄하고 소정산을 지나는 자들은 반드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되 조공이 시묘한 곳이라 하였다. 공이 근검으로 가신을 일으켜 생활이 군색하지 아니하였는데 만년(晚年)에는 가지고 있던 많은 빚문서를 다 불태우며 말하기를 『이것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은 한갓 위태롭고 욕을 끼친 것이다.』 하였다. 궁한 자를 빠짐 없이 구조하고 모자란 자를 구휼하니, 원근 친소가 기꺼이 감복하였다. 순조 무인년(一八一八) 一월 十八일에 고종하니 황계등 가장동 병좌원에 안장하였다. 배는 제주양씨(濟州梁氏) 명보(命輔)의 따님으로 공보다 二十一년 뒤에 출생하였는데 어사(女士)의 행실이 있어 집안을 법도있게 다스리고 재물을 도리있게 경영하였다. 말년에는 七석 토지를 종가에 바치고 四석 토지를 두 딸에게 나누어 준다는 유서를 남겼는데, 묘는 위 아래이다.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진룡(鎭龍)으로 후사를 삼았는데 효행으로서 이름이 있어 향도(鄕道)로 천거되고 사림의 포장을 받았다. 또 그 두터운 덕과 중한 명망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큰 딸은 부사 연안(延安)이 태성(李台成)에게 출가하였는데 바로 기진(基鎭)의 증조요, 둘째딸은 장흥(長興)고 재진(高在鎭)에게 출가하였다. 선호(善浩), 규호(珪浩), 태호(兌浩), 연호(璉浩), 성산(星山) 이 인순(李仁淳), 죽산(竹山) 안 덕수(安德洙)의 처는 진룡의 소생 아들 딸이요, 병두(秉斗), 병문(秉文), 병주(秉周)는 선호의 아들이며 병준(秉準), 병인(炳仁), 병조(秉祚)는 규호의 아들이요, 병철(秉哲)은 태호의 아들이고 병년(秉年)은 연호의 아들이며 제사를 받드는 자는 병두의 아들인데 증현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하다. 공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엄부의 훈계를 듣지 못하였는데도 능히 스스로 퇴패(類敗) 한 세속 가운데서 빠져나와 두텁고 질박하게 행동하고 자긍을 일삼지 아니하며 비록 공명은 없으나 사업이 사람의 이목에 빛나 향당의 칭송이 끊어지지 않아 지금까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시묘한 일은 혹 예제에 지나친 것같으나 상례가 훼손 되면서부터 집에서 처자들과 같이 거처하는 것을 막을 수없기 때문에 문선공 율곡 이 선생의 『격몽요결』에는 시묘를 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무릇 선왕의 지은 예법이 초상 장사보다 더 엄한 것이 없고 인정의 간절한 바가 죽은자를 보내고 상례를 마친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에 그 정성을 쓰지 아니하고 어디다가 쓸 것인가. 아! 공의 지성은 가히 천지를 감동하고 흐린 풍속을 바로 잡아 고풍을 돌이킬 것이다. 기진(基鎭)이 외손의 서열에 참여하여 비록 문하에서 배우지 못하였으나, 공을 알기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여긴다. 특별히 한스러운 것은 당시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고 후진을 지도할 만한 것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도 세상에 전하지 못함이 한스럽다. 후세 군자가 이를 알고 구하면 얼룩진 무늬 하나만 보고도 표범의 전신을 알 것이다. 공의 증손 병문씨가 기진에게 행장을 부탁하는데 나는 글이 부족하여 성덕을 찬양할 수 없으나 좋아한 분이라 하여 아부한 것은 아니니 입언자(立言者)가 있으면 마땅히 채택할 것이다. 외예(外裔) 연안(延安) 이기진(李基鎭)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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